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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정족산 전등사(傳燈寺)...1

송 죽 2012. 11. 21. 17:03

 

'전등사 대웅보전' (보물 제178호 )

 

전등사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정족산성(鼎足山城) 안에 있는 사찰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찰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다.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으로

전등사는 한국 불교의 초기에 세워진 현존하는 최고의 사찰인 것이다.

 

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분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이었다.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으나 1282년 (충렬왕 8년)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傳燈寺)'라 사찰 명칭을 바꿨다.

 

조선 광해군 1614년에 화재로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으나

지경 스님을 중심으로 재건을 시작해 1621년 2월 옛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단풍잎에 뒤덮힌 '대조루'

 1층 이마에는 단풍나무 사이로 ‘傳燈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주차장에서 매표소로 가는길에 계단이 꽤 높다.

 

 

 

'삼랑성(三郞城)' 동문 (국가사적 제 130호)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고려사에는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의 세 아들(부여, 부우, 부소 )이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삼국시대에 그 위에 막돌을 맞추어가며 쌓았고

성체 안에는 막돌을 채운 튼튼한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고려, 조선시대을 거치며 더욱 보강되었다.

 

성안에는 전등사는 물론 고려시대에는 가궐(假闕), 조선시대에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있었다.

병인양요(1866년)때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 군을 물리쳐

이곳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 과 왕실 족보인 '선원보'를 지켰다.

 

 

 

 2500원의 입장료를 내고 성문을 들어섭니다.

 

 

 

'양헌수 승전비'

1866년 병인양요(홍선대원군이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를 점령)때

조정에서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장군 등을 임명하여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양헌수(1816~1888)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1873년(고종 10)에 양헌수 장군 승전비와 비각을 이곳 동문앞에 건립한 것이다.

 

 

 

비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總梁公憲洙勝戰碑)'라고 새겨져 있다.

 

 

 

 

 

 

 

전등사 대웅전 까지는 성문(동문)에서 200여m를 걸어야 한다.

 

 

 

전등사로 가는 길에는 어느새 나무잎이 대부분 떨어지고

단풍잎 만이 붉게 물들어 반기고 있다.

 

 

 

전등사 윤장대(輪藏)

 

 

 

'윤장대(輪藏)'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것으로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600년이 넘은 은행나무

암, 수 두 그루가 있고 꽃은 피는데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군요.

 

 

 

전등사를 찾은 사람들이 하나하나 쌓아만든 탑(?)

 

 

 

 

 

 

 

전등사 초입의 전통 찻집 '죽림다원'

가을 햇살이 짧으니 내려오는 길에 들르기로 하고... 패스

 

 

 

드디어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우측 게단을 오르면 '대조루'를 지나 '대웅보전'이 나온다.

 

 

 

  

 

 

 

나는 좌측으로 발길을 옮겨

새롭게 신축한 이색적인 분위기의 종교 공간인

'무설전(無說殿)'(서운 갤러리)으로 갔다.

 

 

 

템플스테이 건물 아래를 파낸 반지하 형태의 공간엔

불상, 불화, 공간 구성 그리고 법당의 활용 방식까지 완전히 다른 개념의 불사(佛事)다.


석가모니불은 화려한 금빛 불상이 아닌 백색 불상으로 만들어져 있고

탱화가 있어야 할 백색불상 뒤 회벽엔 물감 작업을 한 프레스코화를 그려 넣었는데

프레스코화는 무설전이 국내 처음이란다.

 

천장엔 단청 대신 연등 999개가 매달려 있고

"천장 전체의 큰 사각형"이 1,000을 채우는 마지막 연등이란다.

 

 

 

무설전 입구 통로벽 전체를 현대미술작품을 전시하는 서운갤러리로 만들어져 있다.

 

 

 

 

 

 

 

 

 

 

 

서운 갤러리 작품중

 

 

 

대조루앞 단풍나무

 

 

 

 

 

 

설법전을 나와 단풍나무의 유혹을 외면하고 '정묵당'으로...

 

 

 

'정묵당'

 

 

 

'범종 종각' 과 '약수터'

 

 

 

'약수터'

 

 

 

 

 

 

 

 

 

 

 

'달마대사'(?)

 

 

 

'범종각'

 

 

'범종'(보물 제393호)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하다.

 

이 종은 중국 송(宋)나라 때(1097년)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에서 무쇠로 만든 중국종이다.

음통이 없으며 겉에 상ㆍ중ㆍ하로 구획이 지어져 띠가 둘려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표면에 8개의 네모진 구획이 마련되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많이 마멸되어 판독하기가 어렵다.
이 종은 기하학적 무늬로 장중하고 소박한 중국 종의 솜씨를 보이며

종소리가 맑고 아름다운게 특징이다.

 

 

 

'범종' (보물 제393호)

일제 말기 군수 물자 수집에 광분한 일제가

공출이란 명목으로 빼앗아 가는 바람에 전등사를 떠나는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광복 이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다시 전등사로 옮겨왔다.

 

 

 

'극락암'

범종 종각과 명부전 사이의 계단위에 있다.

근래에 세워진 건물로 전등사 조실이었던 서운 큰스님과 상묵 큰스님이 열반할 때까지 머물던 곳

 

 

 

'대웅전보와 앞마당' 그리고 우측에 '대조루'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강성당으로 기념품을 판다.

극락암 앞에서 바라본 모습

 

 

 

'명부전'

이 전각은 죽은 사람들이 49일 지나 재판을 받을때까지

그들의 넋을 위해 정성을 드리는 곳이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며 영조 43년(1767)

한영(漢英)대사가 시왕전의 시왕을 다시 채색하여 봉안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을 비롯해 시왕 등이 모셔져 있다.

명부전을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명부전 삼존불'

명부전은 부처님의 원력으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법당

목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및 그 권속들로 봉안하고 있다.

 
 

 

 

목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및 그 권속들로 봉안하고 있다.

지장보살을 비롯해 시왕 10위·귀왕 2위·편관 2위·녹사 2위·동자 9위 등 많은 존상들이 모셔져 있다.

 

 

 

명부전 지장시왕상 및 시왕도

 

 

 

명부전 지장시왕상 및 시왕도

 

 

 

 

 

 

 

 '대웅보전 앞마당' 풍경

대조루와 종각이 보입니다.

 

 

 

'약사전' (보물 제179호)

약사전은 중생의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법당이며

대웅보전 서쪽에 위치하는 건물로 대웅보전과 거의 같은 양식의 건물이다.

 

 

 

약사전 내부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석조로 조성한 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이 약사여래불은 최근 금박으로 개금되어 있다.

 

 

'후불탱'

후불탱은 그림 중앙에 약사여래좌상과 좌우협시인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배치하고

상하좌우에는 사천왕을 약사불 뒤에는 가섭과 아난 존자를 그린

병렬식 구도의 그림으로 1884년 혜과 스님이 그렸다.

 

 

'현황탱'

 1884년(고종 21)에 조성된 것이다.

이 탱화는 사람이 죽은 지 사흘 만에 심판하는 현왕과

그 권속을 묘사한 것으로 동호진철 긍법(肯法)이 그렸다.

 

 

 

 

 

 

 

약사전에서 바라본 경내모습

마음껏 가지를 펼치고있는 느티나무는

어느방향에서 바라봐도 넉넉하고 푸근함을 느끼게하는 매력있는 나무입니다.

 

저 뒤 산기슭 우측에 '가궐지' 공터가 있는 곳입니다.

 

 

 

대조루 옆 '종루'

전등사엔 두개의 종이 있으며 종각과 종루로 구분되어 세워져있다.

보물 제 393호로 지정된 범종이 이곳에 있었으나 명부전 앞의 종각으로 옮기고

사진의 종루엔 근래에 만들어진 종으로 조석 예불때 사용된다.

 

 

 

'대웅보전' 정면 (보물 제178호)

건물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이다.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대웅전' 측면


큰법당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본존불로 모신 법당이며

절의 중시이 되는 전각이다.


대웅전이란 '세상을 밝히는 영웅을 모신 전각'이란 뜻이다.

볍화경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일컬은 데서 유래하였다.

 

 

 

'청동수조'

 

지름 112cm, 높이 72cm로 고려 충렬왕 때 정화궁주가 시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청동수조는 불을 끄기 위해 만든 것으로 물을 항상 담아 두었다가 긴급할 때 사용하였다.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하였다.

 

 

 

 

 

 

 

'목조삼존불좌상'

1623년(광해군 15)에 조성되었다.

이 불상은 원만한 상호와 양감·균형감·조각 솜씨가 일품이다.

삼존불은 삼세불이라고도 하며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세 부처님을 말하는데

현세불인 석가여래·약사여래·아미타여래를 모시기도 하고

과거·현재·미래불을 함께 모셔 삼존불이라고도 한다.


 

 

닫집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불단위에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업경대'

1627년(인조 5)에 제작된 전등사 업경대는

죽은 사람이 생전에 지었던 죄업을 보이게 하는 거울로

염라대왕이 갖고 있다고 하며 업경륜이라 부르기도 한다.

 

저승에 가면 생전의 선업과 악업이 그대로 비추어진다는 업경대는

죄를 짓지 말고 선행을 행하라는 경책을 담고 있다.


목각사자의 몸체와 등위에 커다란 불꽃이 활활 일어나고 있는 무늬의 거울이 꽂혀있는데

 불꽃 무늬를 사실적으로 드러내 저승의 무서운 분위기를 보여준다.

 

채색한 색상이 화려하고 이빨에서 머리, 꼬리에 이르기까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동경·단청·명문 등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수미단'

1621년(광해군 13)에 제작된 것으로 가로 4.8m, 세로 1.2m, 폭 2m 규모이다.

수미단이란 절의 법당 정면에 상상의 산인 수미산 형태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불상을 모시던 대좌를 말한다.

 

단 곳곳에 수미산을 상징하는 무늬를 새겨 넣는데

상중하 3단에 연꽃구름·만(卍)자 등을 새기기도 하고

사자·호랑이·코끼리·거북·가재를 조각하기도 한다.

또 상상의 동물인 용과 봉황, 스님·동자·사천왕·비천·도깨비 상을 조각하기도 한다.


 

대웅보전 풍경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측면

 

 

 

뒷면

 

 

 

나부상(裸婦像)은 네귀에 각각 한개씩 네개가 있습니다.

 

이 나부상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네 가지 조각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

 

 

 

 

 

 

 

 

 

 

 

 

 

 

 

강성당

 

 

 

강성당 굴뚝

 

 

 

 

 

 

 

'대조루'

전등사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세운 누각식 건물로

대조루에서 남동쪽으로 멀찌감치 강화해협이 내려다보인단다.

 

 강화해협은 일명 ‘염하’라고도 부르는데

이 염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전등사 대조루이다.

 

 

 

'종루'

 

 

 

 

 

 

 

 

 

 

 

종루

 

 

 

 

 

 

 

 

 

 

 

'명부전'

 

 

 

 

 

 

 

명부전, 약사전, 향로전

주위의 우거진 수목들과 잘 어울리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종루'

 

 

 

 

 

 

 

'향로전'

향로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건물로 불공용 제물의 저장고였으며

 법당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조선 시대에는 상궁이나 나인들이 기도하던 곳으로 쓰이기도 했다.

병인양요 시에는 중군의 거처였다고 한다.

지금은 상임법사실로 쓰고 있다.

 

 

 

'향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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