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은 사적 제354호로 서울 한복판인 종로구 종로 2가 38-1번지에 소재하며
1890년대에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근대식 도심 내 공원으로
1919년 3. 1독립운동의 점화지로 잘 알려져 있다.
탑동공원, 파고다공원 등으로 불리다가
1991년에 이곳의 옛 지명을 따라 탑골공원으로 개칭했단다.
나는 '파고다공원'으로 기억하는 곳인데
비둘기들이 많이 모이고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즐겨 찾는다고
한때 ‘비둘기 공원’ ‘노인 공원’이라고도 불리웠다.
'팔각정'(유형문화재 제 73호)
1919년 3월 1일 4~5천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이곳에 모여
12시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이다.
3. 1운동 기념탑
중앙에 민족대표 33인이 발표한 '독립선언서'가 한문과 한글이 혼용되어 기록되어 있고
좌측은 영문으로 우측은 한글로 기록되어 있다.
좌측
중앙
우측
'원각사비' (보물 제 3호)
이 일대는 세조(世祖) 때 세운 원각사 터로서
세조가 원각사를 창건한 경위를 적어 세운 비석입니다.
비는 공원의 지면보다 낮게 설치되어 있는데
세월이 흐르며 주변이 복토되어 그런듯합니다.
상부는 용이 새겨져 있는데
오랜세월 풍화작용으로 알아보기 힘들정도로 많이 깍여있다.
밑에 받침은 상부 보다는 선명하고 우직해 보이는 거북이가 수고하고 있더군요.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높이 3.3m
손병희(孫秉熙, 1861~1922)는 충북 청원 출신, 방정환(方定煥)의 장인이며
천도교측의 대표로 3·1운동의 주동체로 참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常春園)에서 62세에 사망했다.
'팔각정'과 뒤로 '원각사비'
'팔각정' 과 '원각사지 10층 석탑'
원각사지 10층석탑 (국보 제 2호)
지금은 십층 석탑이지만 사료에는 13층의 탑을 세워
분신사리와 새로 번역한 원각경(圓覺經)을 모셔 두었다고 한다.
4면을 유리벽으로 보호하고 있어 사진발이 안받습니다.
원각사지십층석탑은 높이 약 12m의 대리석에 층층이 아름다운 기와집을 모각하여
기둥, 난간, 공포(栱 包), 지붕의 기와골까지 섬세하게 조각하였으며
옥신에는 부처상과 보살상, 구름, 용, 사자, 모란, 연꽃 등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데
조선시대 석탑으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우수한 조각솜씨를 보여준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제작한 경천사 십층석탑(국보 제 86호)과 여러 면에서 매우 비슷하다.
3. 1정신 찬양비
단기 4300년(서기1967년) 12월에 박종화선생이 글을 짓고 김충현선생이 글씨를 써 세워진 비
아래에 전문을 옮겨 봤습니다.
3.1 정신 찬양비 전문
젊은이들이여 보라
한국의 지성 높은 젊은이 들이여
정의와 자유를 수호하는 이 나라의 주춧돌인 청년학생들이여
이곳에 걸음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어 고요히 주위를 살피고 둘러보라
민족자결의 고함치는 독립만세소리 그대의 귀에 쟁쟁하리라
추상열일 같은 천고의 의기가 그대의 가슴에 용솟음치리라
아~ 아~ 젊은이들이여
이 땅을 길이길이 수호하여 자손만대에 영원히 간직하라
이곳은 1919년 3월 1일 그대들의 선배 젊은이들이 일인 총독의 총칼 아래
희고 푸른 민족정기를 무지개 같이 창공에 뿜어 삼십삼인의 지도자와 함께
인간의 자유와 국가의 독립을 정정당당하게 선포하고 민족 자결을 외쳤던
3.1민족운동의 성스러운 발상지다.
자주독립을 선포한 젊은이들은 맨주먹 빈손으로 고함치며 거리로 내달렸다.
남녀노소 국민들은 뒤를 받쳐 성난 물결같이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불러
하늘 땅을 뒤엎었다.
백수항전의 흰 물결
아~ 아~ "자유 아니면 죽엄을 달라"
민족자결의 고함소리에 백두산도 우쭐대고 동해물도 끊었어라.
일경도 넋을 잃고 총독도 떨었어라.
한식경 뒤에 이 일병은 비로소 총칼을 들고 우리들을 쏘고 찔렀다.
비웃두룸 엮듯 감옥으로 묶어갔다.
피흘려 쓰러진이 거리마다 즐비했네
아~ 아~ 거룩한 한민족의 백수항전이여
탑골공원의 봉화가 서울 장안에 높이 들려지니
삼천리강산 방방곡고엔 산마다 봉화요.
동리마다 불바다였다.
일년을 끌어 온 팔도강산의 3.1만세 대 정신운동은 온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제 감옥에 투옥된 이 사만육천구백여명이요.
총칼에 쓰러져 죽은이 칠천오백구명이요.
상한이가 일만오천구십일명어었다.
아~ 아~ 세계 민족사상에 그 유례가 없는 일치단결된 대 민족운동이요.
만고에 없는 민족의 서사시다.
오늘날 국가의 광복은 이 성스러운 민족운동의 결실이라 하겠다.
아~ 아~ 젊이이들이여 이 정신을 이 땅과 함께 길이 간직하라.
※ 광복은 3.1운동의 결실이니 후세의 젊은 청년학생들에게 3.1 정신을 길이 간직하여
이 땅을 길이길이 수호하여 자손만대에 영원히 간직하라는 내용입니다.
3. 1운동 기념부조
동쪽 담을 따라 십여개가 횡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부조 밑에 자세한 설명이 새겨져있습니다.
부조에는 전국 방방곡곡 우리민족이 독립운동을 하는데 있어서
방해하고 고문하고 힘들게하는 장면들이 적나라하게 새겨져있다.
부조 밑에 자세한 설명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으나
흰색 페인트가 벗겨져 읽기가 쉽지 않아 글로 옮겨 놓았습니다.
1919년 3월 1일 정오 평양 기독교 신자들은 종소리가 울리자 장댓재 예배당으로 모여들었다.
고종황제 추도식을 마치고 이어 거리로 달려나가 천도교인들과도 합세하여
모두들 태극기를 들고 왜경의 총탄을 무릅쓰고 만세 시위를했다.
1919년 3월 1일 오후에 황해도 해주 에서는
문월선등 기생들이 선봉이 되어 만세 시위를 하자
잔악한 기마경찰관 들은 우리민중을 마구 짓밟고
여자의 머리채를 말 꼬리에 잡아매어 끌었지만은
그들은 왜경앞에 조금도 굴하지 아니했다.
1919년 3월 10일 강원도 철원 고을 민중들은 학생들을 선두로
모두들 손에손에 태극기를 들고 물밀듯 거리로 몰려나와 독립만세를 높이 외쳤다.
악독한 왜경들은 총을 마구쏘며 칼을 휘둘렀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행진할 뿐이었다.
1919년 4월 15일 오후 일본군 1개 소대가 수원 제암리에 와서
예수교인들과 천도교인들을 교회당에 몰아넣고 총으로 난사하며 불을 질렀다.
불을 피해 나오는 부인은 칼로써 잔인하게 죽이고
창문으로 내어 보내는 아기들마져 죽였다.
1919년 3월 1일 천안고을 병천시장에 수천명 군중이 독립 선언식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주모자 유중천등 20여명은 현장에서 참살되고
유관순 처녀는 일경에게 체포되 감옥으로 넘어가
혹독한 고문에 항쟁하다 마침내 옥사했다.
1919년 3월 23일 경상남도 진주에서는
기생 수백명이 만세를 부르며 남강가를 행진했다.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총검을 들고 찌르려 했으나
그들은 아우성을 치며 우리는 논개의 후신이라 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앞으로 용감히 달려갔다.
1919년 4월 3일 남원에서 일어난 일이있다.
수천명 군민들이 질서정연하게 만세를 부르다가
방모씨등 10여명이 일본 경찰의 칼 아래 쓰러지자
그의 아내와 어머니마져 달려와 거기서 자결하며
독립을 이루라는 말을 남기고는 눈을 감았다.
1919년 3월 23일 저멀리 제주도에서도
남녀 군중과 학생들이 함께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한나(라)산 정기를 타고난 그들은 맨손으로 달려나가
일본 경찰의 무서운 총칼과 싸워 피를 흘리면서도
행진을 계속하며 한사람도 굽힘이없었다.
탑골공원 사적비
탑골공원의 정문 '삼일문'
공원 외각에 돌담이 둘러져 있고 삼일문외에 동문, 서문, 북문이 더있다.
탑골공원은 저녁 6시까지 무료로 개방 한다는데
내가 5시 30분에 삼일문으로 입장했으니 이날 마지막 입장객이 됐을것이다.
입장을 하고보니 몇안돼는 입장객은 출구로 발걸음을 옮기기 바쁜데
그제서 헐레벌떡 들어온 나에게 직원이 닥아와 빨리 나가달라고 재촉하는 것이 아닌가
주변은 어느새 어두워지니 마음만 급해서
보이는 대로 시진을 찍고 집에 와보니 어둡고 흐리고 엉망진창이다.
3. 1문 옆 담밖에 '경시서 터'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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