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화문(弘化門)
창경궁의 정문으로 보물 제384호이다.
성종 때 지은 건물로 조선시대 궁궐 중 유일하게 동향을 향하고 있는게 특징이다.
정면 3캰, 측면 2칸의 2층 우진각지붕의 목조건축물이다.
기둥과 처마 사이에는 지붕 무게를 지탱하고 장식을 겸하게 한 공포를
기둥과 기둥 사이에 설치한 다포식으로 조선 초기의 양식을 나타낸다.
1484년(성종 15)에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
1616년(광해군 8)에 재건 되었다.
창경궁 대온실
1909년에 건축된 주철골구조와 목조가 혼합된
구조헤에 외피를 유릴 둘러싼 우리나라 최초의 양깃 온실
지인으로 부터 창경궁 야간 해설 투어 예매해 놓은 것 있으니
사진도 찍을 겸 함께 가자고 제의에 마다할 이유가 없다.
다만 강력한 태풍 링링이 제주도까지 와 있고 서해로 진출한다는 상황에
투어 중 비가 올까 봐 그게 은근히 걱정된다.
그동안 서울의 5대 고궁을 다 돌아 봤으나
야간 개장을 처음 체험 해 본다.
5시 경 입장해서 대온실로 직행
천천히 걸어 내려오며 궁 안을 관람하고
7시에 홍화문으로 돌아와 해설사를 만날 계획이다.
왼쪽 춘당지와 둘레길 경계에는 청사초롱이 걸려 있는데
이때는 별 뜻 없이 봤는데 나중에 어두운 밤 가이드와 함께 오니
청사초롱에 불이 켜져 그 운치가 가히 경이롭게 까지 보인다.
벌써 가을이 온 걸까?
한 그루의 나무가 연녹색을 띠며 물들어 반영을 보여준다.
춘당지
지금의 춘당지는 소춘당지와 대춘당지로 두개의 연못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본래 춘당지는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창덕궁에 춘당대 앞 너른 터에 자리했던 작은 연못(지금의 소춘당지)이다.
지금의 춘당지에는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왕이 직접 농사를 지었던 '내농포'라는 11개의 논이 있었다.
일제가 이를 파헤쳐서 큰 연못으로 만들었고,
1983년 이후에 전통 양식의 언못으로 새롭게 조성한 것이
오늘날의 춘당지이다.
춘당지에서 내려오며 성종의 태실비와 풍기대, 혼천의를 보고 내려 오려 했는데
야간에는 통행을 차단해 곧장 내려오게 됐다.
내려오며 느낀건데 어둑어둑 해지는 주변으로
야간에 통행하는 길가에는
낮은 가로등이 은은하게 비춰주며 통행을 유도한다.
명정전 측면과 남산 타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본다.
우측 하단에 낮은 가로등이 보인다.
창경궁에는 이런 저런 종류의 오랜 고목들이 많이 보인다.
그 중에 소나무가 유독 눈길을 끈다.
집복헌과 영춘헌 그리고 좌측으로 양화당과 통명전
실내에 백열등색 조명이 들어와 창밖으로 보는 기분으로는
저 안에 사람이 기거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지금 이곳 집복헌과 영춘헌은 붙어 있으나
원래는 두 집이 분리되어 있던 생활 공간으로
후궁의 생활 공간 이었다고 한다.
사도세자와 순조가 집복헌에서 탄생했고
정조는 영춘헌에서 독서를 즐겼으며 이곳에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명정전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인 정전(正殿)으로,
국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고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르던 장소다.
창경궁은 사적 제123호로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명정전 앞마당엔 박석이 깔려 있고
그 가운데는 어도로 약간 높게 설계되어 임금님만 다니는 길이며
그 좌 우로 품계석이 2열 종대로 도열 해 있다.
가이드의 설명으로 박석(薄石)은 얇을 박자를 써 얇고 넓적하게 뜬 돌이라며
박석이 깔린 옛 사진을 보여 주던데
그 사진에 박석은 지금처럼 사각형의 돌이 정열 된 것이 아니고
제각각의 모양으로 된 얇은 돌을 깔아 놓았다.
후세에 재현을 하며 지금처럼 정형화된 박석을 깔아 놓았던 것이다.
2단 월대 위에 세워진 명정전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우리들(관광객)을 맞이할 위용을 뽐내고 있다.
명정전은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창경궁을 중건할 때 지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왕의 혼례는 중요한 국가 행사 중 하나였다.
명정전에서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가례식이 치러지기도 했다.
단층 지붕에 아담한 규모이지만,
궁궐의 정전가운데에서는 가장 오래되었다.
명정전 주위에는 왕이 일상 업무를 보았던 문정전,
독서를 하거나 국사를 논하던 숭문당이 자리 잡고 있다.
창경궁 넘어 멀리 남산타워에도 조명이 들어왔다.
나중에 가이드께서 알려 주는데
타워의 불빛이 파란 색이면 공기가 맑은 것이고
붉은 색이면 공기가 나쁘다는 뜻이며
노란색이면 보통이라는 설명에 불빛의 깊은 의미를 배워간다.
옥천교에서 바라 본 홍화문
모든 궁궐 마당에는 시냇물이 흐른다.
법전이 있는 궁궐의 안쪽과 외부의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궁궐 뒤의 산과 짝을 이루어 좋은 운을 불러들이는 길지가 되라고
궁궐 앞쪽에 일부러 낸 물길로 이를 '금천'이라 부른다.
창경궁의 금천은 옥천이라 부르는데
이 옥천에 놓인 다리가 '옥천교'이다.
옥천교는 보물 제 386호로 각 부분의 양식과 조각이 특별하며,
특히 다른 궐의 어느 것도다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는 돌다리.
나쁜 기운이 궁궐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옥천교 무지개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을 새겼다.
다리 교각에 도깨비 조각은 나쁜 잡귀를 몰아내는 역할을 한다고...
아쉬움은 창경궁 여기저기 보수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많은 곳이 가려져 있는데
옥천교 바로 지나 명정문도 가려져 있어 마치 허리가 잘려져 있는 기분이다.
저녁 7시에 홍화문 앞 옥천교에서 가이드님 만나
성능 좋은 무선 이어폰과 명찰을 지급 받고
잔뜩 찌푸린 하늘에 비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창경궁에 대해 개략적인 설명을 들으며 달빛기행 행사가 시작된다.
행사는 1시간~1시간 반이 소요될 예정 이란다.
명정전
명정문이 공사로 막혀있어 행각을 뱅 돌아 명정전 부터 시작하는데
주변이 완전히 어둠에 묻혀 조명발 제대로 받으니 궁궐이 더욱 운치 있게 보인다.
봉황을 새겨 놓은 '답도'
왕의 가마가 지나가는 계단 바닥의 장식이다.
왕이 아닌 일반인이 여길 지나가면 곤장으로 다스렸다고 한다.
어좌 와 일월오봉병
명정전 내부 모습이다.
일월오봉병: 조선시대 궁궐 정전의 어좌 뒷편에 놓였던 특수한 그림으로
5개의 산봉우리와 붉은 해, 흰 달, 붉은 몸통의 소나무 등을 소재로 그린 병풍으로
아무나, 아무 곳에서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왕이 앉는 자리 뒤에 놓였던 특수한 그림이다.
명정전 천장
천장 가운데 황금색으로 쌍봉이 장식되어 있다.
그동안 쌍봉 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암 수가 함께 있는 거라고 한다.
봉황은 상서롭고 고귀한 뜻을 지닌 상상의 새로
수컷을 봉, 암컷을 황이라 한다.
위 사진에서 좌측이 봉, 우측이 황인데 꼬리로 구분한다고 .
봉의 앞 부분은 기러기, 뒤는 기린, 뱀의 목, 물고기의 꼬리, 황새의 이마,
원앙새의 깃, 용의 무늬, 호랑이의 등, 제비의 턱, 닭의 부리를 가졌다.
정명전 처마
빈양문
빈양문은 왕의 공적 공간인 명정전과
사적 공간인 내전을 가르는 동시에 연결하는 경계로
왕이 명정전으로 들어가던 문 이다.
이 복도를 이용하여 비를 맞지 않고 문정전으로 왕래하게 했다.
문 이름 빈양(賓陽)은 ‘밝음을 공경히 맞이한다’는 뜻이며
밝음인 양(陽)은 국왕을 상징한다고 한다.
꽃창살 안이 명정전
왕이 저 꽃창살 문을 열고 들고 났을 것 같아 인증샷 한컷
문정전
왕이 경연을 열거나 집무를 보는 중요 공간이었다.
일상 업무를 보던 편전으로
창경궁 외전이 전체적으로 동향한 것과 달리 문정전은 남향하고 있다.
이 건물이 가장 산뜻하다.
이유는 숭례문(남대문)의 방화범이 이 곳에 방화를 하고
그때 죄값을 치뤄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풀어줘
다시 숭례문에 방화를 했다며 해설사의 흥분된 멘트가 이어폰을 통해 들려온다.
해설사는 이곳에서 열변을 토하는데
문정전은 사도세자 참극의 역사적 공간이기도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인 비극적인 사건
바로 1762년의 임오화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당시 문정전은 혼전이 되면서 '휘령전'으로 잠시 명칭이 바뀌었다.
영조는 휘령전을 지날 때, 죽은 왕비 정성왕후의 혼령이
자신에게 와서 사도세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아라렸다고 했다.
사도세자를 죽여야 하는 이유를 혼전에서 혼령의 소리를 들었다는 것으로
정당화 시키려 했던 것이다.
영조는 문정전에서 세자에세 칼을 휘두르며 자결할 것을 명했다.
세손인 정조 또한 아버지의 죽음을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처분은 가혹했다.
밧소주방의 뒤주가 들어왔는데 크기가 작아서 쓸 수가 없자.
다시 어영청에서 쓰는 큰 뒤주를 들어왔고
영조는 여기에 들어갈 것을 명하였다고 한다.
결국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히게 되었고,
영조가 직접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서 8일 만에 28세라는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아들이지만 수명이 왕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었던 조선왕조에서
최장수 왕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최대의 정적이기도 했다.
영조의 장수는 사도세자의 제거로 이어졌고,
영조는 세자가 제거된 후에는 '사도'라는 시호를 부여하면서
미안한 감정을 표시했다.
조선왕실 최대의 참극이 일어났던 공간 문정전,
250년 전 그 날 불호령을 내렸던 영조,
문정전 앞마당에 놓였던 뒤주 앞에서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던 사도세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던 혜경궁 홍씨,
이들은 모두 떠나갔지만,
문정전 앞마당은 그 날 역사의 현장이라며
가이드의 열변을 맺는다.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 뒤 좌측 뜰에 있는 탑이다.
창경궁에 올때마다 안내문을 찾아도 있을법한 안내문이 없어
늘 궁굼해 하던 탑이다.
해설사에게 이 탑에 대해 물으니 '무명탑'이란다.
무명용사탑이라는줄 알고
이어폰으로 들어 내가 잘못 들었나? 하는데
이름도, 출생지도 몰라 안내문도 없었던 거다.
창경원으로 바꿔 부르던 왜정시대에
어딘가에 있던 석탑을 이곳에 옮겨 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란다.
무명탑 이지만 어느 산사에 있는 것 보다
현란한 조명을 받고 관광객을 맞는다.
좌측: 경춘전, 우측: 환경전
경춘전은 대비의 일상 생활공긴인 참전이고, 환경전은 왕의 침전이라고 한다.
환경전
창경궁을 창건한 해인 1484년(성종 15)에 처음 지은 것이다.
통명전, 경춘전, 양화당과 함께 창경궁의 내전을 구성하는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광해군 8)에 재건하였다.
1830년(순조 30)에 다시 큰 불이 일어나 조선 중기의 건물도 불타버리고
지금의 건물은 1833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침전이었으므로 남향으로 앉히고,
남, 서, 북쪽에 행각을 두르고 동쪽에 담장을 둘러
독립된 구역을 설정하였으나.
주변의 부속건물은 모두 없어진채 주건물만이 남아 있다.
1544년 중종이 승하 하였다.
환경전
이때부터 우려하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환경전
경춘전
정조와 현종이 탄생한 곳
경춘전
빗방울이 굵어져 모두들 처마 밑으로 몸을 피하고
우리는 환경전 뒤에 마루가 있어 그곳에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환경전 뒷마루에 앉아 비를 피하며
멀리 양화당 뒷쪽 언덕에 조명이 밝혀져
렌즈를 최대한 당겨 찍은 고목나무
춘당지 야경
10 여분 기다리니 비가 가늘어 지고 춘당지로 향했다.
춘당지 외곽엔 청사초롱이 불을 밝히고 있었고
가운데 섬에도 조명이 설치되어 몽한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춘당지 상부 서쪽에 있는 '팔각칠층석탑'
몇 해전 왔을때 곧 쓰러질것 같았는데
지난 6월에 왔을땐 보수를 하느라 천막으로 가려 있었다.
이제 보수를 끝내고 밝은 조명을 받으며
춘당지에 멋진 반영을 만들어 놓고 있다.
이 탑은 보물 제 1119호로, 조선 성종 원년(1470년)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일제 강점기인 1911년 창경궁에 이왕가 박물관을 건립할 때
상인으로 부터 구입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큰 비는 피하고, 달빛 없는 창경궁 달빛기행이 끝을 맺었다.
홍화문으로 돌아와 무선이어폰을 반납하고 나니
해설사님이 선물을 주겠다며 창경궁을 소재로 한 사진엽서를 건네받고
일행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 왔다.
해설사의 박식한 해설을 들으며 돌다보니
마치 옛날 이야기 듣듯 흥미로운 시간이었으며
좀 더 긴 시간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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