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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

송 죽 2019. 4. 6. 02:44

서울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에 다녀왔다.

코엑스에 볼일을 보고 조금 일찍 나와 

카메라 없이 스마트폰만 들고 한 바퀴 둘러 보았다.

 

어릴적 뚝섬에서 무동력선(땜마)를 타고 건너가 

한참을 걸어 '봉은사' 경내를 구경 했으니

어언 60년은 됐음직 한데

 

그때의 봉은사는 규모도 적었던것 같고 

꽤나 고찰(古刹)로 기억 했는데

강산이 대여섯 번 바뀐 세월에 다시 가보니 

몰라보게 바뀌어 있었다.

 

 

794년(원성왕 10)에 '연회국사'가 창건하여 '견성사'라 했다.

 

1562년(명종 17) 문정왕후가 주도하여 

견성사 터가 명당이라 하여 수도산 아래로 옮겼고 

사찰의 명칭을 봉은사()로 개칭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때 불탄 것을 중건 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다시 대부분의 전각들이 파괴되었으며 이후에 재건하였다.

 

봉은사는 우리나라 선종()불교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법왕루(), 북극보전(殿), 선불당(佛堂),

 천왕문(), 일주문() 등의 당우()가 있다.

 

 

 

 

'진여문'(사천왕문)

사찰에 드어서는 첫 번째 문을 일주문(一柱門)이라고 하는데

봉은사에서는 '진여문'이라고 한다.

진여(眞如)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뜻한다.

그러므로 진여문에 들어선다는 것은 곧 부처님의 세상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봉은사 진여문은 '선정릉지'의 '봉은사사적' 에 의하면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건물로 기록되어 있다.

 

'선정릉지' 는 조선 제9대 왕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를 모신 선릉, 

그리고 11대 왕 중종을 모신 정릉의 제향과 수호 및 운영에 관해 기록해 종은 책이다.

 

현재 원본은 남아있지 않으며 일제강점기의 이왕직찬시실에서 원본을 보고 베낀 필사본이 남아 있다.

필사본은 1925년 이왕직 장관을 역임했던 민영기(閔泳綺)가 작성한 것이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봉릉사찰이자 선종 수사찰인 봉은사는 

진여문, 천왕문, 해탈문이 순서대로 늘어선 위엄 있는 사찰이었다.

 

그 뒤의 기록은 알 수가 없고, 

1939년 대화재 때 판전을 제외한 

대웅전, 동서승당, 진여문, 만세루, 창고 등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그 뒤 1941년 대웅전과 동서승당, 1942년 영산전, 북극전, 만세루, 천왕문 및 

산문(山門)을 세운 것으로 기록되었다.

 

즉 이때 진여문과 해탈문을 복원하지 못하고

다른 사찰처럼 일주문을 세운 뒤 1939년 화마로 부터 피해를 입지 않은 사천왕을 모실

천왕문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구 뒤 영암스님과 밀운스님이 주지를 이어 맡으며 진여문의 복원을 발원하여

1982년 일주문 자리에 진여문을 세웠다.

 

건축 상식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이지만

일반 건물에 비해 기둥의 간격과 높이 등에서 훨씬 크게 지어졌기 때문에

칸수에 비해 실제로는 규모가 큰 건물이다.

 

가운데 대문에는 각각 칼과 창을 든 신중상이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비천상이 그려져 있다.

 

좌우에는 1998년 법왕루를 신축하면서 헐려진 천왕문에 있던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60호인 봉은사 목조 사천왕 입상이 있다.

 

지붕 아래에 걸려 있는 현판은 앞에는 '수도산 수선종 봉은사'라고 하여

봉은사가 선종의 으뜸 사찰임을 나타내고 있다.

뒤에는 '진여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봉은사라는 현판은 한때 해인사로 출가한 뒤 만해 한용운스님과 '만당(卍堂)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던 서예가 청남(菁南) 오재봉(吳齋峯, 1908~1991년)이 쓰고,

진여문이란 현판은 봉은사 주지를 역임한 석주스님이 썼다.

 

옛 일부문은 1982년에 경기도 양평 사나사로 옮겨져 

그 사찰의 일주문 역할을 하였다가 2000년대 중반에 사나사의 일부문 불사로 인해

봉은사의 옛 일주문은 완전히 해체도고 말았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 비파를 들고 있다.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은 붉은빛을 띤 몸에 화난 듯한 눈을 가지고 있다. 

오른손에는 용을 움켜쥐고 있으며 왼손에는 용의 입에서 빼낸 여의주를 쥐고 있다.

 

 

 

 

 

 

 

 

 

'공덕비'와 부도

 

 

 

 

 

 

 

 

 

'진여문'

진여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뜻하는 말로 

진여문에 들어선다는 것은 곧 부처님의 세상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1982년에 진여문과 대웅전을 중창 하였다니 

그리 오래된 건물은 아니다. 

 

진여문 앞에는 공사로 건축 자재가 쌓여 현판만 찍고

진여문 전경은 경내에서 바라 본 모습을 찍었다.

 

 

 

 

'진여문'

 

 

 

 

만면에 가득한 미소부터 넉넉해 보인다.

 

 

 

 

'법왕루'

 

 

 

 

'대웅전'

대웅전은 1982년에 새롭게 중창이 된 최근의 건물이라고 한다.

 

 

 

 

 

 

 

 

 

3층석탑

1975년 진신사리 1과를 봉안한 삼층석탑과 석등을 조성하였다.

 

대웅전 앞 마당엔 연등이 가득 매달려 있다보니

대웅전 전경과 탑이 가려져 있어 연등 사이로 요렇게 밖엔 찍을 수 없었다.

 

 

 

 

'미륵대불'

10년에 걸쳐 1996년에 완공 되었다고 한다.

높이 23m로 국내 최대 크기라고 한다.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 좌대를 포함하여 전체 높이가 33m로 

세계최대 규모의 석불이라고 있던데...?

 

 

 

 

 

 

 

 

 

'판전' 현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3호

시대 : 1856년(철종 7)

 

이 현판은 조선 후기 문인서화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별세하기 3일 전에 썼다고 한다.

 

큰 글자 옆에 세로로 ‘七’(칠십일과병중작)이라는 잔글씨가 덧붙어 있다. 

추사 71세 되던 1856년, 병을 앓는 중에 썼다는 얘기다. 

 

 

 

 

봉은사에서 간행한 각종 서적의 목판을 보관하는 건물. 

조선 후기 1856년, 정면 5칸 측면 3칸, 익공식 맞배지붕이다.

 

철종 때 승려 영기()와 남호()가 조각한 

《화엄경()》(81권) 《금강경()》 《유마경()》 등 

불경판() 13종, 3,438장이 보존되어 있는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범종각(梵鐘閣)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범종으로

수명을 다하고 이곳에 보호중이라고 한다.

 

 

 

 

'범종각'(梵鐘閣)

 

 

 

 

???

 

 

 

 

 

'연지관세움보살상' 

 

'연지관세움보살상' 모셔진 연못은 

아미타불 극락세계의 연꽃이 핀 

아홉 개의 연못 중 하나를 표현하고 있고

'연지관세움보살상' 손에는 감로수 병을 들고 있다.

 

 

 

 

'보우당'

2000년 아쎔 정상회의를 위해 국가의 지원을 받아 건립한 건물로

보우대사의 불교 중흥의 큰 뜻을 기리기 위해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보우당'

 

 

 

 

 

짧은 시간 다 둘러 보지도 못하고

스마트폰으로 급하게 몇장 찍었는데 사진이 맘에 안든다.

언젠가 다시 시간을 내서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