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1960~1970년대 도시 저소득층의
집단 밀집 주거지인 달동네 일부를 옮겨와
서민들 생활 모습을 재현해 놓은 박물관이다.
생생한 생활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재개발 당시 철거하며 나온 건축자재와 가재도구들을 하나하나 모으고
일부는 주민들로 부터 기증을 받아 그대로 옮겨와 재현했다.
당시의 주거 환경과 생활모습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구멍가게, 연탄가게, 이발소, 솜틀집 그리고 공동수도와 공동변소 까지 재현돼
그 모습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지만 자취나마 간직하고 있다.
'수도국산'의 원래 이름은 산언덕에 소나무가 많아
'송림산' 또는 '만수산'이라 불렀는데
송현(松峴 솔 고개)동, 송림(松林 소나무숲)동의 지명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인천은 수질이 나쁘고 우물도 적어 개항 이후 증가한 인구와 선박에 물 확보가 어려워
1909년 인천과 노량진을 잇는 상수도 공사를 하고 수도국산 정상에
수돗물을 담아두는 배수지(配水地)를 설치 하면서
'수도국산(水道局山)'이란 이름이 붙었다.
솔숲은 일제 강점기 부터 강제이주에 의한 새로운 거주지가 되었으며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과 산업화로 인구가 집중되어
3천여 가구가 모인 달동네가 되었지만
지금은 주변이 재개발되어 대단위 아파트와 공원으로 변해있다.
수도국산에서 내려다 본 인천시내
박물관 내부 배치도
박물관 내부는 지하실 형태로 외부 빛이 차단된 어두움을 백열등이 비추워 주지만
매우 어두워 후레쉬 사용을 금지한 사진찍기가 만만치 않다.
비닐로 코팅된 '주민등록증' '도민증'
포스터와 표어들
전주 꼭대기 가로등이 조명입니다.
뻥튀기
선거벽보 (전국구 비례대표)
이만섭, 민병기, 윤치영, 차지철...많이 들어본 이름도 보이내요.
태엽을 감아 동작하는 '벽시계'
솜틀집
양철 물조루와 연탄바켓
연탄가게
선거 포스터
이발관 간판
한국전쟁 직후부터 송현동 수도국산 달동내에 있었던
약 5평 정도의 흙벽에 기와집 이발관
이발관 내부
구멍가게
담배가게
주로 구멍가게 한켠에 마련되어 있었다.
구멍가게
주류, 식빵, 잡화, 담배까지
구멍가게에 진열된 정겨운 물건들
국수, 통조림, 통성냥, 차약, 실, 이뿐이 비누는 화장비누겠죠,
비닐봉지에 담긴 조미료를 길게 연결해 생산하고
긴 비닐봉지를 매달아 놓고 팔았다.
뽑기 풍선, 백열전구, 신화당, 맥주, 소주, 하이타이, 양초
막대사탕, 박하사탕, 과자, 웨하스, 뽀빠이, 손오공 과자에 쫀득이까지
센베이도 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정겨워 보였던 페인트가 벗겨진 나무 사탕통
딱지
당시 조미료 라이벌인 국자의 미풍과 신선로의 미원
그리고 미래의 식품을 개발한다는 라면 선전벽보와 막걸리 주전자까지
담배집 간판
아리랑 담배
노란필터가 달린 당시엔 고급담배
돈통
처마밑에 시레기
부엌 앞에 절구와 돌절구통
가게 덛문에 각종 포스터를 많이 붙었었다.
수상한 사람 신고하여 간첩으로 판명되면
상금 100만원에 보로금 50만원까지 준다는군요.
70년대 초에 군대생활 할때인데 병장 봉급이 1,200원으로 기억됩니다.
공동수도와 물지게
장작를 때는 아궁이부엌
부엌 천장
부엌 한켠에 양은 밥상 그 위에 양은 그릇
앨범이 귀하던 시절 가족들의 기념사진을 액자에 꽂아 걸어 놓았죠.
장농이 없는 집의 이불
지금은 침대를 쓰니 이불 갤 일이 없지만
이당시엔 이불을 개어 장농에 넣었다.
'부적'
잡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햐여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집에 벽이나 문에 붙으는 종이로 몸에 지니기도 했다.
일년치 달력이 한장에...
정치인들이나 동내 큰상점에서 배포한 달력으로 집에 한장씩은 붙여 놓았었지
좁은 골목길엔 양철을 말아 만든 이런 굴뚝이 있었다.
방학때면 숙제로 쥐꼬리 모아 제출하고
나중엔 쥐약 놓는 날이 있어 집집마다 쥐약을 놓고
동내 강아지들 수난도 많았다.
판자로 만든 굴뚝도 있었다.
지금은 콘크리트 전주 지만 그당시엔 목주도 많았다.
공중변소
달동네는 집이 작아 수도나 변소를 집집마다 둘 형편이 안돼 공동으로 설치하였고
아침마다 공동변소에 줄을 서서 앞사람을 재촉하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던 풍경이었단다.
부엌에 찬장이 없으니 이렇게 선반을 매 놓고 사용했다.
장독대
표어
가정의례와 간첩 신고 하라고
지금은 수입품을 국산으로 둔갑시켜 판매하려고 혈안이지만
예전엔 공산품이 귀해 외제를 선호하다 보니
등교길엔 '국산품 애용' 이란 표어를 왼쪽 가슴에 달고 다녀야 했고
외국 여행이 쉽지 않은 시절이니
미군부대 PX에서 흘러나온 양키물건 하나 있으면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U.S.A를 보여주며 자랑했고 보는 사람은 부러워 했다...ㅎ
양담배 또한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한대씩 나눠주며 피우고
양담배 피우다 단속에 걸리면 많은 벌금을 물어야 했으니 격세지감이다.
좁고 굽은 골목길
이집은 동내에서 행세 좀 하는 꽤 있는 집이다.
마루엔 뒤주가 놓여있고 천장도 높은데 방에는 TV까지 있으니
저녁이면 동내 꼬마들 어지간히 붐볐을것 같다.
부의 척도 였을까?
사진 액자도 큼지막 하다.
선반에 반지고리도 칼라
비록 문살은 부러졌지만 가운데 문양도 있는 고급스러운 안방문
부엌에 조그만 찬장도 있다.
방에는 TV와 위에는 트렌지스터 라디오가 있고 목각 인형을 올려 놓아 장식한 모습
TV 부라운관에서는 김일 선수의 레스링 경기가 진행되고 있다.
대문위를 스라브 치고 장독이며 빨래줄을 설치해
공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여긴 다른집 방으로 미니옷장이 놓여있다.
부뚜막에 양은솥이 정겹다.
나무 빨래판
지금은 집집마다 세탁기가 있지만
세탁기가 없던 시절엔 빨래판 하나는 가정의 필수품
'체'
곡물의 가루를 가려내는 도구로 망의 구멍 크기가 여러가지 있었는데
여름방학이면 고기잡는 다고 몰래 가지고 나갔다 구멍내고 혼나기 일쑤였다.
단촐한 부엌살림
'만화가게'
이 만화들은 꺼내서 볼 수 있다.
기념품 판매소
이곳에 진열된 물건들은 판매용으로 구입할 수 있다.
오재미와 곤봉
가을 운동회때 사용하던 물건들이다.
우리때만 해도 '크레용'이라 불렀던것 같은데
언제부턴지 '크레파스'라고 하는 모양이다.
책가방
'고무신 땜질틀'
고무신이 구멍나면 덛대어 본드로 땜질해서 신었다.
높은 건물도 없던 시절에 고도가 높으니 전망은 최고였을거다.
예술작품을 창작하던 책상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듯
파이롯드 잉크와 펜대가 놓여 있는 책상이 여러 작품들과 함께 있다.
고향 땅을 등지고 도시로 모여든 사람들의 자화상은 당시 예술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이러한 사회현실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당시 예술작품에 반영되었다.
문학에서 당시 달동네사람들의 삶을 그린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었는데
현덕의 남생이(1938),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 등이 대표적이며
TV드라마 달동네(1980), 영화 꼬방동네사람들(1982)의 작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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