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가지]-----/국내여행

창경궁에 살구가 익을때

송 죽 2019. 6. 29. 22:39


본래 창경궁 터에는 1418년에 세운 수강궁이 있었다.

수강궁은 세종 때 상왕(上王) 태종을 위해 창덕궁 동편에 창건한 궁이었다.


1483년에 성종이 3명의 대비를 위해 

이 터에 크게 궁궐을 다시 짓고 창경궁이라 불렀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사실상 하나의 궁궐을 이루어 이 둘을 합쳐서 동궐(東闕)이라 하고,

후원의 정원도 공동으로 이용했다.


창경궁은 창덕궁의 부족한 생활공간을 보충하여 왕과 왕비뿐 아니라

후궁, 공주, 궁인의 처소로도 사용했다.


경복궁처럼 일정한 원칙을 좇아 경영된 궁궐과 달리,

창경궁은 건축 형식과 제도 면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세워지고 이용된 궁궐이었다.


궁궐은 남향이 원칙이지만, 장경궁의 중심 부분은 특이하게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동쪽에 왕실 동산인 함춘원(含春苑)과 낙산이 자리를 잡고 있어 

그곳을 바라볼 수 있도록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생활공간들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창경궁은 자연 지형을 따르면 서도 생활의 편의를 추구햐여 궁궐을 조성했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친근함을 두루 갖춘 궁궐이 되었다.


임진왜란(1592년)때 서울의 다른 궁궐과 함께 불에 탔다가

1616년에 재건되었다.


이때 다시 세운 명정전, 명전문, 황화문 등은 창경궁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궁궐 건물들에 속한다.




창경궁의 전성기는 1830년대였다.

동궐도(東闕圖)에는 여러 대비궁, 후궁과 공주들의 처소, 궐내각사 등이 

촘촘하게 들어서고 곳곳에 정원 시설이 조화를 이룬 당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시민 공원으로 바꾸고, 이름마져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종묘와 연결된 땅의 맥을 끊고 그 사이에 도로를 개설하여 궁궐의 품격을 훼손했다.

1983년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 모습을 되살리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비록 아직 많은 유적들을 복원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창경궁의 모습에서 왕실 생활의 채취를 느낄 수 있다.




홍화문을 들어서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금천(禁川) 위에 놓인 옥천교

이 옥천홍를 넘으면 명정문과 좌우 행랑채가 있다.


헌데 지금 창경궁 내 이곳 저곳에는 

높은 휀스를 쳐 놓고 보수 작업이 한창이라 출입이 안된다.
(다리 우측에 보수용 휀스가 보인다.)




현재 보수중인 명정문을 지나면 널찍한 뜰이 나오고, 

그 일직선 상의 중층으로 된 기단 위에 명정전이 있다. 


홍화문 좌우의 행랑이 명정전 까지 계속되면서 울타리를 이루어, 

창경궁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명정문은 홍화문 보다 높은 지대에 있고, 

명정전은 명정문 보다 한층 더 높은 곳에 있는데, 

이러한 예는 창덕궁과 개성()의 만월대에서 볼 수 있다고 한천.




옥천교




옥천교




금천(禁川)

좌측에 황화문과 금천 끝에 옥천교가 보인다.




금천엔 간신히 바닥을 적시고 있는 물과

노랗게 익은 살구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홍화문과 옥천교




홍화문에서 명전전 까지 이어진 행랑 한쪽에 문으로 바라 본 정원

문 우측으로 역시 높은 공사용 가림막 벽이 보인다.  




홍화문에서 명전전 까지 이어진 행랑과 회랑




회랑앞 자두나무












행랑채를 가로 질러 들어가니 고즈넉하고 아늑한 숲이 반긴다.




















추정 수령 150년의 회화나무와 추정 수령 130년의 느티나무로

뿌리와 줄기가 뒤엉켜 자라고 있다.


정조와 혜경궁이 살얼음판 같은 궁궐에서 서로를 서 있는 모습이 연상된다고....








춘당지의 암컷 원앙새








춘당지 옆 '백송'

백송은 소나무 종류의 하나로써 하얀껍질이 특징이다.

처음부터 하얀 껍질이 아니라 어릴 때는 초록색이 들어간 푸른빛이다가

나이를 먹으면서 차츰 흰 얼룩무늬가 많아진다.


원래 고향은 중국 베이징 부근이며,

조선옹조 때 사진으로 간 관리들이 귀국할 때 솔방울을 가져다ㅏ 심은 것이 여기저기 퍼졌다.

그러나 생장이 매우 느리고 번식이 어렵다.












초롱꽃




초롱꽃




초롱꽃




관덕정

관덕정은 1942년에 지었으며 활을 쏘던 정자였다.

앞쪽의 넓은 빈 터는 군사 훈련과 무과 시험장으로 쓰였다고 전한다.


정자 뒤로는 단풍 숲이 우거져서 여러 임금들이 단풍의 아름다움을 읆은 시가 전한다.


관덕정 앞 석물에 무언가 올려져 있어 가까이 다가가니 얼룩무늬 고양이 한마리가 

사주 경계를 하며 정자를 지키기라도 하는 듯 

나와 눈이 마주치고 도망은 커녕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을 발산한다.
























대 온실 앞 르네상스 식 분수대




대 온실 내부




꽃치자

치자나무와 비슷하나 잎과 꽃이 작으며

치자에 비해 꽃이 아름답기 때문에 꽃치자라고 부른다.


꽃 향이 얼마나 진한지 대 온실엔 꽃치자 향이 가득했다.












속새








금감 (운향과)

백색 꽃이 1~2개 달리며 열매는 오렌지색으로 익고 3~5월에 수확한다.

나무의 크기에 따라 한 그루 당 수 백개 이상의 열매를 채취할 수 있다.












유자 열매












유자나무 가시




대 온실 앞마당








춘당지

창덕궁 쪽 절벽인 춘당대와 짝을 이룬 연못이었으나

지금은 담장으로 나뉘어있다.


현재의 소춘당지가 원래의 춘당지이고, 

대춘당지는 1909년에 내농포에 속한 11개 논을 하나의 언못으로 만든 것이다.


대농포는 임금과 왕비가 각기 농사와 양잠을 체험할 수 있도록 궁궐 안에 둔 논과 뽕밭이다.

대춘당지의 섬은 1984년에 만들었다.




















성종태실 

태실은 왕자의 태반을 묻어 기념했던 조형물이며 

태실비는 그 사연을 기록한 비석이다.


태실은 전국의 풍수가 좋은 명당에 흩어져 있었고,

성종의 태실은 경기도 광주에 있었다.


1928년 즈음에 조선 왕실의 태실 대부분을 서삼릉으로 모으는 과정에서 

가장 형태가 온전한 성종태실만 이곳으로 옮겨 연구용으로 삼았다고 한다.








태실비
















양화당 굴뚝








통명전








통명전




양화당








경춘전



양화당




영춘헌








영춘헌




영춘헌




영춘헌 앞 노송




통명전과 양화당




경춘전, 환경전




환경전




석탑




'빈양문'

빈양문은 왕의 공적 공간인 명정전과

사적 공간인 내전을 가르는 동시에 연결하는 경계로

왕이 명정전으로 들어가던 문 이다.


문 이름 빈양(賓陽)은 ‘밝음을 공경히 맞이한다’는 뜻이며

밝음인 양(陽)은 국왕을 상징한다고 한다.




명정전 뒤




명정전과 문정전 사이




명정전 뒤




담 넘어 창덕궁

이 곳에도 공사용 칸막이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향나무와 담넘어 창덕궁




명정전

임금이 만조백관의 인사를 받거나 나라의 큰 행사를 치르던 정전








명정전




남쪽 행랑채 회랑








궁 내부엔 고목이 많은데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점점 고사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여기저기 한창 공사 중인 창경궁을 돌아보고

금천으로 되돌아와 홍화문으로 퇴장했다.





'-----[가지가지]----- > 국내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궁수문장 교대의식(덕수궁)   (0) 2019.07.17
서울식물원(마곡동)  (0) 2019.07.16
북한산 우이령 풍경...4  (0) 2019.05.14
북한산 우이령 풍경...3  (0) 2019.05.14
북한산 우이령 풍경...2  (0) 2019.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