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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송 죽 2012. 2. 3. 18:29

 

 

포로 로마노 동쪽에 접해있는 투기장으로

긴쪽 188m, 짧은쪽은 156m, 둘레 527m, 외벽높이 48m의 4층으로 된 로마 최대의 원형경기장

로마 중심부에 위치하고 대부분 석재와 벽돌로 만들어져 

아래층부터 층층이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콤퍼지트식 등 당시 건축기법을 총 망라해 지었다.

 

 

 

 

 

2천년 전에 이런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자체가

눈으로 보면서도 놀랍고 믿기질 않습니다.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왕조 때 세워진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이라고 합니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바로 서쪽에 네로황제의 황동거상에서 시작되었다는 설과

거대하다는 뜻의 '콜로세오'에서 기원하였다는 설 두가지가 있다.

 

 

 

 

 

본래 네로황제의 황금궁전 일부인 인공연못을 네로황제가 화제사건으로 자살하자

후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AD 72년에 흙을 채우고 경기장을 만들기 시작하여

 8년만인 AD 80년 티투스 황제때 대형 원형경기장으로 완공되었다.

 

 

 

 

네로황제에게 시달린 로마 시민들을 달랠 목적으로 만든 콜로세움은

완공후 기념의식으로 100일간 축제를 열었는데

이 기간 수백명의 검투사와 9천 마리 이상의 야생동물이 희생 되었다고합니다.

 

 

 

 

 

투기장(아레나)에서는 검투사와 검투사간 혹은 검투사와 맹수 사이의 처참한 격투가 벌어지고

검투사는 주로 식민지 노예들 이며 맹수는 사자, 코끼리, 하마등을 굶주려 싸움에 내보냈다 합니다.

 

 

 

 

 

아~! 콜로세움 관광 내내 어릴적 본 영화 '스팔타카스'가 떠오른다.

희미한 기억의 영화속 장면을 떠올려 보면

굼주린 사자와 싸우고, 검투사끼리 싸우며

어깨에 망또를 두른 로마 시민들이 환호하는 함성속에

황제가 음흉한 웃음을 머금고 엄지 손가락을 아래로 향한다.

 

노예였던 스팔타카스는 검투사가 되어

같은 처지의 검투사와 싸움에 이기지만 

상대의 죽임을 고뇌하던 그모습이 아련한데 

정녕 이곳에서 있었던 일이었던가....

포로로 잡혀온 노예들의 외침이 또렷이 기억난다..... "아임 스팔타카스!!!"

 

죽음과 삶 밖에 없는 절박하고 처절한 혈투가 300여년을 이어져 온 장소이다.   

 

 

 

 

로마 정치가들에게 원형경기장은 시민들에게 무료로 볼거리를 제공하며

선심까지 쓰느라고 입장시엔 점심으로 빵까지 주었다니 인기가 높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화합을 도모하며

때론 로마나 귀족의 권위에 불복했을땐 보복을 암시하는 공간이었다.

 

고대 로마 시민들에겐 콜로세움이 경기를 보며 일체감을 느끼고

그 내용을 즐기는 하나의 공공 오락시설이었다.
 

 
 

 

 

또한 그리스도교 박해 시대엔 신도들을 학살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는데

박해된 크리스트교도가 여기서 순교 했다고 전해지는 것 때문에

로마 교황 베네딕트14세에 의해서 콜로세움은 신성하다고 해서 성지가 되었다.

 

 

 

 

 

내부의 투기장은 최대지름 86m 최소지름 54m의 마루로 되어 있었으며

투기장 아래는 검투사방, 맹수우리, 기계장치 등이 매우 복잡하게 시설되어 있답니다.

 

좌석은 투기장를 중심으로 가파르게 경사져 있어

경기장 안의 모든 관객들이 중앙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잘 볼 수 있게 되어있고

또한 음향이 매우 훌륭하게 메아리쳐 관람의  감동을 더해 주었다 합니다. 

 

 

 

 

 

 

4단으로된 관람석은 4만 5천개의 좌석과 5천개의 입석을 갖추었는데

최대 7만 5천명 까지도 수용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서울상암월드컵경지장 수용인원 : 6만8,450명)

 

천정 부분은 개방되어 있지만 차양용으로 옷감을 치는 설비가 있었답니다.

이른바 햇빛으로부터 관중들을 보호하기 위해 베라리움(Velarium)이란 천막 지붕을 설치되어 있었는데붕 가운데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어서 채광은 물론 환기구 역할을 했답니다.

 

지금 중앙의 지하 구조물을 발굴중이며 옛 방식대로 복원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검투사 시합은 공화정 말기에 세계 정복자로서의 로마군들의 전투정신을 고양시킬 목적으로 생긴 경기이며 훗날 이 경기를 위하여 검투사를 양성하게 되고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더 잔인한 양상으로 변모 되었다.

 

 

 

도미티아누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코모두스 등 여러 황제들도 직접 검투에 참가하였고 그 중에 성격이 포악했던 코모두스에 의해 수많은 검투사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집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의 후계자들은 이 경기를 금지하려 하였으나 이 경기에 대한 열광을 막을 수 없었다.

5세기 초반 동방에서 온 텔레마크라는 수도사가 검투경기 도중 경기장으로 뛰어들어

관중들을 향하여 경기를 중단할 것을 호소하였지만 그는 흥분한 군중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고

405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함에 따라 그 잔인한 역사가 끝났다. 

 

 

 

 

76개의 아치형 출입구엔 고유번호가 있으며 좌석마다 번호를 부여하고

입장권에도 좌석번호가 있어 많은 인원이 이동해도 혼잡을 피할 수 있게 만들어져

5먄여명이 10분이면 동시에 입장과 퇴장을할 수 있게 되어있답니다.

 

 

 

 

각충엔 신분을 고려해서 왕족, 귀족, 시민, 여성, 노예까지 좌석을 따로 배치했고

화장실은 강물을 끌여들여 수세식 으로 만들었고

천장은 가죽으로 씨워 비를 피했다니

머리속 상상이 2천년 전의 경기장이 지금의 종합운동장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더군요.

 

 

 

 

 

 

 

원래는 대칭으로 타원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AD 442년 대지진이 일어나 파괴되고

서로마가 멸망하며 방치되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답니다.

 

 

 

 

 

 

 

 

 

 

외벽엔 수없이 많은 구멍들이 있는데 금속(납)이 떨어져 나간 자국이랍니다.

원형건물을 견고히 하기위해 대리석에 금속심을 넣었 연결했다는데

중세시대 전쟁에 사용할 무기를 만들고 교회와 공청건물 그리고 성곽을 지으며

이곳에 붙어있던 금속(납)들을 모조리 뜯어간 흔적인 것이지요. 

 

 

 

 

제한된 시간에 모두 볼 수 없다는 머리속 계산이

발걸음을 멀리 못하고 근처만 배회하다 만듯 아쉬운데

어드덧 감동의

'콜로세움'을 뒤로 해야할 시간인데 발걸음이 안떨어진다.... 

 

 

 

 

 

차도에서 이런 유적을 보고 있자니

을지로 6가 로타리에서 동대문 운동장을 보는 기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