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좌춤은 8~9세된 어린 중이 연희자와 관객들의 무사함을 기원하고
잡귀를 물리치며 사방신께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의식무이다.
상좌춤은 상당한 경지에 오른 연희자가 추는 춤으로서
웬만큼 추어서는 그 춤의 멋과 맛을 제대로 나타낼 수 없으며
양주별산대놀이의 춤사위를 고루 갖추고 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경기도 양주시 주내면 유양리에서
전승되어온 가면극(탈놀이)으로서,
1964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탈들은 전반적으로 완만한 타원형의 곡선과
곱게 다듬어진 볼록면을 지니고 있으며,
색감이 밝고 회화적으로 배합되어 있다.
현재 경기도 양주시 주내면 유양리에 전수회관을 두고 있다.
원래 산대놀이는 서울 근교에서 전승되던 가면극으로서,
애오개(아현동)·녹번·구파발·사직골 등에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초기에는 연희자들에 의해 행해졌지만
이후 재능있는 서민층들에 의해서도 행해졌다.
학자들은 흔히 애오개·사직골 등에 있었던
원래의 산대놀이가면극을 본산대놀이라고 부르고,
본산대놀이로부터 전파된 양주와 송파 등지의 가면극을 별산대놀이라고 부른다.
앞놀이·본놀이·뒷놀이로 구성되며 대사, 춤과 몸짓, 무언극을 포함하고 있다.
유래
양주별산대놀이의 유래에 대하여,
송석하와 아키바 다카시(秋葉隆)는
애오개본산대놀이의 영향, 조동일 소장의
양주별산대놀이대본(1957년본)에서는
사직골 딱딱이패의 영향, 1930년에 필사된
양주별산대놀이 김지연본의 제보자인 조종순은
구파발본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양주별산대놀이의 유래에 대하여는 여러 의견이 제시되었지만,
대체로 19세기 초·중엽에 본 산대놀이 계통의 가면극을 본떠
성립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역사
양주별산대놀이는 춤과 무언극, 덕담, 익살이 어우러진 민중 놀이이며,
음력 3월 3일, 4월 8일(석가탄신일), 5월 5일(단오),
8월 15일(추석), 9월 9일(중양절)과 기우제(祈雨祭) 때 놀았다.
그리고 섣달 그믐날 밤에 관아에서 나례(잡귀를 쫓는 행사)를 거행할 때,
가면을 쓰고 동헌과 관아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잡귀를 쫓는 의식에 참가하기도 했다.
원래 양주별산대놀이의 공연 장소는 사직골이었다.
사직골에는 토지신과 곡물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당(社稷堂)이 있었는데,
당집 앞의 넓은 마당이 놀이판으로 사용되었다.
양주별산대놀이의 놀이꾼은
원래 관아의 잡역에 종사하던 하층민이었다.
그래서 반주음악을 위해
관아의 악사청에 소속되었던 악사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산대놀이나 해서탈춤은 '삼현육각(三絃六角)'
즉 피리 2·젓대 1·해금 1·장구 1·북 1 등의 악기로 반주하며,
음악도 전문적인 악사들만이 연주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탈놀이꾼과 악사가 분리되어 있다.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은 상업이 발달했던 곳에서 공연된 것들이 많다.
본산대놀이 중 가장 유명한 애오개산대놀이의 전승지인 애오개는
서울 3대 시장의 하나인 칠패시장과 인접하고 있으면서,
현방(懸房, 조선 후기 서울 근교의 독점적 푸줏간)이 있던 곳이다.
노량진에도 본산대놀이가 있었다고 하는데,
노량진은 경강(京江) 지역의 나루였다.
별산대놀이의 전승지인 양주와 송파는 18세기경
금난전권(禁難廛權)을 가진 서울의 시전상인(市廛商人)에 대항하는
사상도고(私商都賈)가 서울로 들어가는 물자를 장악하면서
상설 시장을 벌였던 곳이다.
양주에서는 일제강점기에도 난장을 텄을 때
낮에는 줄타기를, 밤에는 양주별산대놀이를 공연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1929년 9월 경복궁 조선박람회에서 열린 공연을 계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매일신보』 1929년 12월 8일자 신문에 의하면 양주별산대놀이패가
이 공연을 끝으로 그 도구 전부를 모두 팔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총독부박물관에서 이를 구입하는 동시에
활동사진으로 촬영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때의 가면들은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활동사진은 아직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또한 당시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의 교수였던 다카하시 도루(高橋亨)는
놀이패의 우두머리인 조종순(趙鍾洵)을 연구실에 초빙하고,
극의 유래·전수·조직 등에 관하여 3일여에 걸쳐 조사하고 대본을 채록했다.
가면을 팔고 연희자들이 해산되면서 크게 약화되었던
양주별산대놀이는 1930년대 초 다시 놀다가
일제강점기 말에 크게 약화된 후 명맥만 유지했다.
1951년 11월 김성대의 후원에 힘입어
김성태는 기억을 더듬어 탈을 복원하고
남은 소수의 인원으로 놀이를 복원했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8명의 연희자가 예능보유자로 인정되고,
사단법인 양주별산대놀이보존회가 결성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내용
양주별산대놀이는 크게 앞놀이·본놀이·뒷놀이로 구성되고,
때로는 본놀이만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앞놀이는 마을을 순회하는 길놀이와 탈을 놓고 제사하는 탈고사로 구성된다.
본놀이는 완전히 연극적인 부분으로
내용은 제1과장 상좌춤, 제2과장 상좌·옴중놀이, 제3과장 옴중·먹중놀이,
제4과장 연잎·눈끔적이놀이, 제5과장 염불놀이, 제6과장 침놀이,
제7과장 애사당법고놀이, 제8과장 파계승놀이,
제9과장 신장수놀이, 제10과장 취발이놀이,
제11과장 의막사령놀이, 제12과장 포도부장놀이,
제13과장 신할아비·미얄할미놀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성
제1과장 상좌춤에서 상좌 둘이 나와서 사방을 향해 절을 하고 춤을 추는데,
이는 모두 종교적인 의식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과장의 후반부에 이르면 의식적인 춤은 타령조의 깨끼춤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그간에 수도를 쌓은 상좌가 타락하여 세속적인 놀이판에 자진하여 참여하게 되었음을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제2과장 옴중과 상좌에서 상좌는 물건을 팔러 다니는 옴중을 만나자, 온갖 세속적인 작태를 무언으로 연출한다.
상좌는 도적놈·불가사리·폭력배·어른 뺨치는 놈 등으로 비유된다.
상좌와 대결하는 옴중 역시 본래는 중이었으나, 행상질이나 하면서 놀이판 주변을 찾아다니는 추한 존재로 등장한다.
그가 쓴 탈에는 전염성이 있는 옴이 잔뜩 올라 있어 보기만 해도 징그럽고 추하다.
한동안 상좌에게 몰리던 옴중은 끝내 상좌를 내쫓고 신명나게 춤을 춘다.
제3과장 옴중과 먹중에서 옴중은 새로 등장하는 먹중에게 자신의 지체를 자랑하려드나, 번번이 망신만 당하고 만다.
옴중을 계속 놀려대는 먹중은 석 삼 년이나 굶은 중으로서, 남의 일수나 월수만 써버릇한 가난하고 염치없는 중이다.
결국 먹중은 옴중을 놀이판에서 몰아낸다.
제4과장 연잎과 눈끔적이에서 연잎과 눈끔적이가 등장하여, 타락한 중들인 상좌와 옴중, 먹중을 벌한다.
연잎과 눈끔적이는 특이한 차림새를 하고 있다.
연잎은 붉은 얼굴에 이마에는 청색 연잎을 쓰고, 학의 무늬가 그려진 청창의(靑氅衣)를 입고 있다.
눈끔적이의 가면은 적흑색인데, 눈구멍이 크며 속에는 개폐 장치가 되어 있어 눈을 끔적끔적할 수 있다.
호랑이를 그린 장삼을 입고 있다. 이들은 고결한 존재로서, 상좌·옴중·먹중 등 계율을 어긴 파계승들을 쫓아버린다.
제5과장 염불놀이에서 염불놀이는 정상적인 의식으로서의 염불이 아니다.
가령 염불에서 아미타불에 대한 기원을 "나무할미타불, 나무에미타불"이라 해, 남의 부모를 야유하는 언동을 한다.
이밖에도 백구타령·가사·노랫가락 등 세속적인 노래를 불러댄다.
이 과장에 등장하는 먹중들은 모두가 자신의 신분과 처지를 망각하고, 놀이판에 모인 관중들과 함께 어울려 신나게 논다.
제6과장 침놀이는 먹중이 아들·손자·증손자를 데리고 산대놀이 구경을 나왔다가,
이들이 체하자 의원을 불러 침을 맞히는 내용이다.
제7과장 애사당법고놀이는 왜장녀의 딸인 애사당이 나와서 먹중과 함께 법고를 치며 노는 내용이다.
왜장녀라는 말은 본래 몸집이 크고 염치없는 짓을 서슴없이 잘하는 여자를 가리킨다.
이 과장에서도 먹중들은 그들의 신분을 망각한 채, 제금을 치고 꽹과리를 두드리며 행상인의 짓을 벌인다.
땜쟁이의 흉내도 낸다. 이러한 분위기에 왜장녀가 애사당을 데리고 나와 뚜쟁이짓을 벌인다.
돈을 요구하던 애사당은 흥정 금액이 많지 않자 왜장녀를 때리기도 한다.
먹중과 합의가 이루어지자, 애사당은 그의 등에 업히기도 하고 함께 법고를 치면서 놀이판을 벌인다.
돈을 모은 먹중들이 매음녀를 유혹하는 장면을 연출해 보임으로써 타락상을 표현한다.
제8과장 파계승놀이에서 소무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해 버린 노장은
육환장을 집어던지고 접근하나 번번이 거절당한다.
그는 도박판으로 뛰어들어 돈을 딴다.
돈을 움켜쥔 노장을 보자, 소무들은 노장을 받아들인다.
제9과장 신장수놀이에서 신장수는 보자기로 원숭이를 씌우고 등장해 신을 판다.
그러면 노장이 소무들의 신발을 외상으로 산다.
신장수가 원숭이에게 신 값을 받아오는 대신 소무 한 명을 빼오라고 한다.
그러나 원숭이는 소무를 성적으로 희롱한 뒤 그냥 오기 때문에, 신장수는 원숭이와 실랑이를 벌인다.
제10과장 취발이놀이에서 취발이가 등장해 소무를 빼앗으려고 하자,
노장은 옷을 벗어던지고 결사적으로 취발이에게 달려든다.
그러나 결국 노장은 젊고 힘이 있는 취발이에게 패배한다.
지금까지 승승장구 이겨왔던 노장은 취발이에게 소무 한 명을 빼앗기고, 남은 소무와 함께 도망한다.
취발이가 소무를 차지한 후, 소무는 취발이의 아이를 낳는다.
그러면 취발이가 아이에게 글을 가르친다.
제11과장 의막사령놀이는 쇠뚝이가 양반이 거처할 의막(임시 거처)을 정하는 역할을 하므로,
그를 의막사령이라 부른 데서 생겼다.
샌님이 서방님과 도련님 그리고 하인인 말뚝이를 대동하고 놀이판에 등장하여 의막을 정할 것을 명한다.
말뚝이의 친구인 쇠뚝이는 명령을 받고 돼지우리를 임시거처로 정한다.
그래서 양반들은 돼지새끼로 야유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언청이의 모습(첫째양반, 둘째양반)이거나 코와 입이 비뚤어져 있는 모습(종가집도령) 등
비정상적으로 생긴 가면으로 인하여 풍자된다.
제12과장 포도부장놀이에서 샌님과 포도부장이 샌님의 첩인 소무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툰다.
샌님은 늙고 힘없는 무능한 존재로서, 젊고 힘있는 포도부장에게 소무를 빼앗긴다.
제13과장 신할아비·미얄할미놀이는 신할아비와 미얄할미가 놀이판에 나왔다가 미얄할미가 죽게 된다.
그래서 일찍이 집을 떠났던 남매인 도끼와 도끼누이가 모여들어 어머니의 장례(진오귀굿)를 치르는 내용이다.
이상의 양주별산대놀이와 거의 동일한 내용의 산대놀이가 이미 18세기 중엽에 서울에서 공연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이천(姜彛天, 1769-1801)의 한시 〈남성관희자(南城觀戱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강이천은 열 살 때인 1778년 남대문 밖에서 꼭두각시놀이와 가면극을 보고,
11년 후인 1789년에 이 한시를 지었다.
이 시에 묘사된 가면극을 통해서 상좌춤과장, 노장과장, 샌님·포도부장과장, 할미과장을 갖춘 가면극이
서울 근교에서 전문적 연희자들에 의해 연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다른 지역의 가면극에 비해서 매우 사실적이다.
양반을 풍자하는 정도에 있어서도 양주별산대놀이는 하회별신굿탈놀이와 봉산탈춤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봉산탈춤에서는 양반들을 직설적으로 공격한다.
이러한 사실성은 가면의 모양에서도 드러난다.
산대놀이 가면은 매우 인간적인 모습이고, 비교적 아기자기하고,
손질이 많이 가해져서 기교적이고 다양하며, 가면의 크기가 대부분 비슷하다.
그러나 야류와 오광대의 가면은 선이 굵고 투박하며,
생김새가 단순하면서도 개성이 강하고, 말뚝이가면은 모두 매우 큰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산대놀이 가면은 해서탈춤과 마찬가지로 중가면이 많이 등장하고, 야류·오광대에는 중가면이 현격히 적다.
현재 연행되는 양주별산대놀이에 등장하는 인물은 32명이지만,
하나의 탈을 다른 배역에 겸용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사용되는 탈은 22점이다.
첫째상좌(도련님 겸용)·둘째상좌(서방님 겸용)·옴중·먹중(4) ·연잎·눈끔적이·완보·신주부·왜장녀(해산모·도끼누이 겸용)·노장·첫째소무(애사당 겸용)·둘째소무·말뚝이(신장수·도끼 겸용)·샌님·포도부장·신할아비·미얄할미 등이다.
특히 양주별산대놀이의 옛 가면은
1929년 9월 박람회가 개최되었을 때 경복궁에서 양주별산대놀이를 초청하여 공연한 후
경성제국대학에 판 양주별산대놀이 탈이라고 알려진 22점이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놀이에 사용되는 탈은 가면제작 기·예능보유자였던 유경성(1989 해제)의 후계자 유한수가 제작하고 있다.
양주별산대놀이의 춤은 우아하고 섬세한 중부지방의 무용적 전통을 전형적으로 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춤사위가 분화되고 종류도 다양하다.
전반적으로 염불장단의 거드름춤이 발달되었고,
정중동(靜中動)·답지무(踏地舞)·감치고 조이는 손춤사위 등이 특징이다.
염불장단은 비교적 쉬운 약박(6박)을 쓴다.
거드름춤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깨끼춤을 동반하고 있다.
깨끼춤은 타령장단에 맞추어 춘다.
타령장단은 느린 염불장단보다 적당한 빠르기로 다양한 춤사위로 변화될 수 있는 소지가 많다.
같은 타령장단이라 해도 걷기가 주가 되는 춤을 걸음걸이춤이라 한다.
굿거리장단은 등퇴장이나 길놀이를 할 때 주로 사용되는 장단이다.
빗사위는 양주별산대놀이에서 흥을 돋우기도 하지만, 상대방의 눈을 피해 돌아가는 춤이다.
마치 수탉이 암탉을 홰치는 듯한 모습으로 오른손은 오른쪽 귀 위로 꺾어 올리고,
왼손은 옆으로 벌려 약간 아래쪽으로 내리고, 머리는 상대방이나 판 중앙을 주시하고
무릎을 살짝살짝 굽혔다 폈다 하면서, 원을 돌거나 상대편 자리로 이동하는 춤이다.
거수빗사위는 양주별산대놀이에서 옴중과 노장이 장삼을 휘둘러 앞에 있는 장애물을 헤치면서 걸어가는 춤이다.
오른발을 앞으로 높이 들고, 오른손을 오른쪽 어깨에 얹고 왼팔을 등 뒤로 넓게 돌렸다가,
왼팔을 몸 앞으로 넓게 돌려오면서 오른발을 앞으로 뻗어 내리는 듯하다 옆으로 딛으면서 왼발을 앞으로 들어올린다.
장삼은 어깨에 얹은 채 왼발을 앞으로 들었다가 옆으로 내딛으면서 왼팔을 등 뒤로 넓게 휘두른다.
이상과 같은 춤사위의 세분화와 다양화는 곧 양주별산대놀이의 연극적인 표현의 확장과 심화를 뜻한다.
초기 주요 연희자 및 전승을 주도한 사람들은 관아의 잡역(雜役)에 종사하던 하급 관속이었다.
산대놀이는 서울 및 서울 인근의 경기도에서 전승되던 가면극이다.
원래 애오개(아현동)·녹번·구파발·사직골 등에 산대(山臺)놀이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대신에 애오개 또는 녹번리의 산대놀이를 배워왔다고 하는 양주별산대놀이와,
구파발본산대 등에서 배워왔다는 송파산대놀이가 현재 전승되고 있다.
최근에는 퇴계원산대놀이도 복원되었다.
학자들은 흔히 애오개·사직골 등에 있었던 원래의 산대놀이를 본산대놀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양주와 송파 등지의 별산대놀이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양주별산대놀이는 1930년 연희본이 학계에 발표된 이후, 다른 지역 가면극에 비해 다양한 채록본이 등장했다.
양주별산대놀이의 대사는 다른 가면극에 비해 욕설, 외설어, 은어가 많은 점이 특징이다.
〈양주별산대놀이보존회본〉은 2002년 양주별산대놀이보존회에서
보존회의 공연과 전수생 교육을 목적으로 작성한 것이다.
전체 구성은 제1과장 상좌춤, 제2과장 옴중과 상좌, 제3과장 옴중과 먹중, 제4과장 연잎과 눈끔적이,
제5과장 팔먹중 과장(1경 염불놀이, 2경 침놀이, 3경 애사당 법고놀이),
제6과장 노장 과장(1경 파계승 놀이, 2경 신장수놀이, 3경 취발이놀이),
제7과장 샌님 과장(1경 의막사령놀이, 2경 포도부장놀이), 제8과장 신할이비와 미얄할미, 뒤풀이로 구성되어 있다.
의의
양주별산대놀이는 서울의 본산대놀이를 계승한 가면극으로서 그 유래가 분명하고,
일찍이 1920년대에 학자들의 관심을 끌어 대본도 채록되어 있다.
또한 1929년 조선박람회 당시 연행에 사용되었던 가면들이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당시 상황을 비교적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 연구에 있어 양주별산대놀이는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이라 할 수 있다.
양주별산대놀이의 춤은 우아하고 섬세한 중부지방의 무용적 전통을 전형적으로 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춤사위가 분화되었고 종류도 다양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주별산대놀이 (한국전통연희사전, 2014. 12. 15., 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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